창작/소설

20년 썸남이었던 유치원 동창과 결혼까지 한 진짜 이야기 (ft. 어린이집부터 시작된 인연)

수다 SUDA 2024. 12. 22.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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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썸남이었던 유치원 동창과 결혼까지 한 진짜 이야기 (ft. 어린이집부터 시작된 인연)

프롤로그

봄바람이 살랑이는 3월의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민지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 마주쳤던 그 얼굴. 유치원 때부터 대학교까지, 그리고 이제는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계속되는 이 인연이 때로는 짜증나고 때로는 설레게 만드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만나네요, 강현우 씨."

민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그녀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

제 1장: 처음 만난 날

2004년 봄, 서울의 한 유치원.

"우리 민지, 이제부터 여기서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지내자~"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첫발을 내딛은 박민지는 낯선 환경에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때 옆에서 들려온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현우야! 뛰지 말고 선생님 말씀 들어야지!"

까만 머리를 양옆으로 늘어뜨리고 주황색 유치원복을 입은 한 남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강현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제 2장: 유치원의 라이벌

봄날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교실을 비추는 오전, 자유 놀이 시간이 시작되었다. 민지는 평소처럼 그림 그리기 코너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꼭 예쁜 무지개를 완성하고 싶었다.

"어? 보라색이 없네..."

민지가 주변을 둘러보니 강현우가 보라색 크레파스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꼭 민지가 좋아하는 연보라색이었다.

"현우야, 그거 잠깐만 빌려줄래?"
"싫어! 나도 쓰고 있잖아!"
"너는 지금 파란색 쓰고 있잖아! 보라색은 안 쓰고 있었어!"

순간 현우의 손에서 크레파스를 잡아당기는 민지. 하지만 현우도 놓지 않았다. 결국 '뚝' 소리와 함께 크레파스는 두 조각이 되고 말았다.

"으앙! 선생님! 현우가 제 크레파스 뺏었어요!"
"민지가 먼저 제 색종이 찢었단 말이에요!"

담임 선생님인 김미영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두 아이에게 다가왔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

"현우야, 민지야. 이리 와보세요."

선생님은 두 아이를 데리고 교실 한켠의 '우리들의 약속' 게시판 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 무슨 약속했었죠?"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기요." 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현우는 민지가 크레파스를 빌려달라고 할 때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요?"
"...잠깐 빌려줄 수 있었어요."
"민지는 어땠나요?"
"...억지로 뺏지 말고 기다릴 수 있었어요."

그날 오후, 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각자의 그림을 그렸다. 현우는 가끔 민지의 그림을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민지도 현우의 그림이 궁금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와, 현우야 네 그림 진짜 잘 그렸다!" 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너도 무지개 예쁘게 그렸어."

그렇게 잠시 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 날이면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민지가 감기로 결석했다.

"선생님... 민지는 언제 와요?"
평소엔 민지를 귀찮아하던 현우가 조용히 물었다.

이틀 뒤, 이번엔 현우가 할머니 댁에 가서 결석이었다.

"선생님, 오늘 현우 왜 안 왔어요?"
민지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미영 선생님은 그런 두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신경 쓰는 모습이 귀여웠다. 매일 아침 등원할 때면 제일 먼저 서로를 찾아보는 눈빛, 간식 시간에 몰래 서로의 간식을 바꿔 먹는 모습, 낮잠 시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까지.

"저 둘이 나중에 커서는 어떤 사이가 될까?"
선생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 창 밖의 벚꽃을 바라보았다.

제 3장: 초등학교의 운명

2010년 3월, 벚꽃이 흩날리는 서울의 봄날이었다.

"새 일학년 여러분, 반 배정 발표하겠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게시판 앞에 선 민지는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1반 박민지!"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이름도 확인했다.
"4반 강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옆에서도 비슷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야, 너도 여기 왔네."
"그러게... 너랑은 다른 반이라서 다행이다."
"너무 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싫지만은 않잖아."
"뭐래. 너랑 같은 반 되면 골치 아프다고."

새 학년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각자의 반에서 적응해나갔다. 민지는 1반에서 반장이 되었고, 현우는 4반에서 부반장이 되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운명은 장난스러웠다.

"자, 2학년 반 배정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반이 되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민지가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현우도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같은 반이 되고 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야, 이번 수학 시험 문제 어려웠지?"
"응... 근데 난 마지막 문제가 제일 힘들었어."
"나도! 그거 어떻게 풀었어?"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나눠 먹기도 하고, 청소 시간이면 서로 도와가며 교실을 깨끗이 했다. 물론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순간도 많았다.

"이번 시험에서 내가 이길 거야."
"흥, 두고 보자."

중간고사 때는 민지가 이기고, 기말고사 때는 현우가 이기는 식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성적이 떨어지면 서로 걱정하는 마음도 컸다.

"너 이번에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어?"
"몸이 좀 안 좋았거든..."
"그럼 그렇게 말을 하지... 자, 이거 내 필기노트. 다음엔 꼭 이겨야지?"

어느새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졌다. 아침에 등교할 때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졌고, 하교 길에 우연히 마주치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야, 너네 엄마가 보내주신 김밥 맛있더라."
"그래? 다음에 또 갖고 올게."
"진짜? 약속했다?"
"그래그래."

그렇게 2학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현우는 민지가 강아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민지는 현우가 실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가 없는 시간이 왠지 허전하다는 것을.

제 4장: 중학교의 그림자

2013년 봄, 서울 대명중학교.

새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날, 민지는 거울 앞에서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 치마 길이는 적당한지, 리본은 반듯한지 확인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민지야! 학교 늦겠다!"
"네, 엄마! 이제 나가요!"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옆집에서도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

"어... 너..."
"너도..."

강현우였다. 작년과 달리 훌쩍 자란 키, 조금은 굵어진 목소리, 새로 자른 듯한 단정한 머리... 그리고 낯설게 느껴지는 남자 교복.

"너도 대명중 왔네."
"그러게... 너랑은 좀 떨어지고 싶었는데."

민지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묘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낯선 중학교 생활에 적어도 아는 얼굴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첫 날 반 배정 시간.

"박민지, 1반..."
"강현우, 4반..."

초등학교 때처럼 다른 반이 된 것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야, 너 혹시 박민지 알아?"
현우의 반 친구가 물었다.
"응? 아...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진짜? 와, 대박. 1반에서 제일 예쁘다는 애 말이야."

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쁘다고? 그 시끄럽고 깐깐한 박민지가?

한편, 민지의 반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오갔다.

"민지야, 4반 강현우 알아?"
"응? 어... 그냥 옛날부터 안면만..."
"완전 잘생겼더라. 키도 크고."

민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생겼다고? 그 고집불통 강현우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서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급식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느려졌다.

"저기... 박민지!"
어느 날 하교 시간, 현우가 민지를 불러세웠다.
"응?"
"이거...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 주라고 하셨어."

손에 들린 반찬 통. 두 집안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끔 반찬을 나누곤 했다.

"아... 고마워."
"그리고..."
"응?"
"... 아니다. 조심히 가."

말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갔다. '너 요즘 살졌다'는 걱정도, '시험 잘 봤니?'라는 관심도, '왜 그 남자애랑 같이 다니니?'라는 질투도.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면 서로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민지는 현우가 수학 문제를 풀 때 진지한 표정으로 연필을 돌리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현우는 민지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린다는 걸 눈치챘다.

체육대회 날.

"다음은 2학년 반 대항 이어달리기 시작하겠습니다!"

민지는 1반의 마지막 주자였고, 현우는 4반의 마지막 주자였다.

"민지야 파이팅!"
"현우 오빠 이겨라!"

응원 소리가 뒤섞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땀이 이마를 적셨다.

"준비... 땅!"

바통을 받는 순간, 세상은 둘만 남은 것 같았다.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동안, 민지는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란히 갈 수 있을까?'

경기는 현우가 이겼다. 하지만 그날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각자의 가슴 속에서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으니까.

제 5장: 고등학교의 설렘

2016년, 대명고등학교 입학식.

"2학년 1반, 박민지..."
"2학년 3반, 강현우..."

이제는 서로 다른 반이 되어도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마치 운명처럼.

"야, 너 문과야?"
"응, 넌 이과?"
"그래."

교실 배정이 끝나고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 민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새로 한 단발머리가 사춘기 특유의 풋풋함을 더했다.

"너한테 어울린다."
"뭐가?"
"그... 머리..."

현우는 말끝을 흐리며 급히 교실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민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등학교 생활은 바빴다. 아침 자율학습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끝없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시간들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도서관에서.

"박민지, 너 여기서 뭐해?"
"공부하러 왔지. 너는?"
"나도..."

학교 도서관보다 조용한 시립도서관. 그곳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공부를 했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이거..."
현우가 민지의 책상 위에 따뜻한 캔 커피를 올려놓았다.
"벌써 두 시간째 앉아있더라."
"고마워..."

모의고사 날이면 더욱 긴장되었다.

"박민지, 이번에 전국연합 모의고사 1등 했다며?"
"응... 근데 너도 3등이었잖아."
"역시 넌 대단해."
"별로... 그냥 운이 좋았어."

현우는 민지의 겸손한 모습에 미소 지었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에도 도서관에 남아 공부하는 모습,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놓지 않는 모습,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영단어를 외우는 모습까지.

"너도 곧 1등 할 거야."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야, 민지야! 다음 주 대학 입시 설명회 같이 갈래?"
"어? 아... 그래."

불쑥 끼어든 남학생을 보며 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민지는 그 모습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학년이 되자 입시 준비는 더욱 치열해졌다.

"너 목표 대학 어디야?"
"서울대... 너는?"
"나도..."

도서관 귀퇴 시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너라면 붙을 수 있을 거야."
"너도..."
"그래도 혹시... 둘 중 하나라도 떨어지면 어쩌지?"

민지의 물음에 현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만날 수 있겠지?"
"응... 아마도."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창밖의 같은 달을 보며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금은 입시가 먼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능 전날 밤.

"민지야."
"응?"
"내일... 잘 봐."
"너도..."

문자 메시지로 나눈 짧은 대화. 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
'네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
'우리가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

"Fighting! ❤️"

작은 하트 이모티콘에 담긴 큰 용기. 그것이 고등학교 시절 두 사람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제 6장: 대학교의 우연

2019년 3월, 서울대학교 신입생 입학식.

벚꽃이 흩날리는 관악캠퍼스에서, 민지는 경영대학 신입생 환영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 박민지?"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민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훨씬 더 성숙해 보이는 강현우가 서 있었다.

"강현우? 너도 서울대..."
"응. 컴퓨터공학부."
"나는 경영학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반가움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축하해. 네가 꿈꾸던 과에 붙었네."
"너도... 너도 축하해."

그렇게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캠퍼스는 넓었지만, 두 사람의 발걸음은 늘 어떻게든 겹쳤다.

중앙도서관 4층 열람실.

"이 자리 혹시..."
"앗, 미안. 여기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서로였다.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석자리를 두고 마주친 것이다.

"같이 볼래?"
현우가 먼저 제안했다.
"...그래."

그날부터 그 자리는 그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학생식당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오늘도 김치찌개야?"
"너야말로 맨날 부대찌개네."
"습관이란 게 무섭지."
"그러게..."

무심코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관심은 감출 수 없었다.

대학교 축제 때였다.

"민지야, 우리 과 부스 와봐!"
친구들이 민지를 컴퓨터공학부 부스로 끌고 갔다.

"자, 여기 VR 체험..."
설명을 하던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
"안녕..."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현우의 친구들이 눈치채고 키득거렸다.

"야, 강현우. 너 저번에 말한 그 민지가 이 민지였어?"
"아... 그게..."

민지는 귀가 빨개졌다. 현우가 자신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축제의 열기도 고조되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예쁘다..."
민지가 중얼거렸다.
"응... 정말 예뻐."

하지만 현우의 시선은 불꽃이 아닌 민지를 향해 있었다.

2학년이 되자 전공 수업이 더욱 바빠졌다. 그래도 두 사람은 시간을 내서 만났다.

"이번 학기 전공 어때?"
"힘들어... 너는?"
"나도... 근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응?"
"아니... 그냥,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힘이 나서..."

말을 끝맺지 못하는 현우를 보며 민지는 미소 지었다. 그들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3학년 여름방학.

"민지야, 이번 방학 인턴은 어디로 갈 거야?"
"삼성전자... 너는?"
"네이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래도 응원했다.

"잘 될 거야."
"너도..."

캠퍼스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변화했다.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또 만났네."
"그러게..."

우연인 척 하는 만남들. 하지만 사실 둘 다 알고 있었다. 서로의 시간표를, 자주 가는 장소를,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마음을.

제 7장: 청춘의 혼란

2022년 가을, 취업 준비의 계절.

중앙도서관 4층, 여전히 그들만의 자리였다. 하지만 이제 책상 위에는 전공 교재 대신 취업 관련 서적들이 가득했다.

"너는 무슨 기업 준비해?"
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고민 중이야. 너는?"

현우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화면에는 각종 IT 기업들의 채용 공고가 떠있었다.

"나도... 그래서 말인데..."
"응?"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현우가 드디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민지를 바라보았다.

"왜?"
"취업박람회 간다고 했잖아. 혹시... 같이 갈래?"
"..."
"아, 싫으면 괜찮아! 나 혼자..."
"가자."

민지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말, 코엑스 취업박람회장.

"와,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손 잡을까?"
"응?"
"아니, 그러니까... 떨어질까 봐..."

현우의 귀가 빨개졌다. 민지는 살짝 웃으며 현우의 손을 잡았다.

부스를 돌아다니며 두 사람은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민지는 대기업 부스에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었고, 현우는 IT 스타트업 부스에 관심을 보였다.

"너는 역시 대기업이 잘 어울려."
"그래? 근데 스타트업도 끌리는데..."
"너라면 어디서든 잘할 거야."
"고마워... 너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민지야."
"응?"
"우리... 각자 다른 회사 가게 되면 어떡하지?"

민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응. 지금처럼..."

'지금처럼'이라는 말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뛰었다. 지금 이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중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취업 준비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밤늦게까지 스터디를 하고, 면접을 준비하고, 때로는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도서관에서.

"민지야, 괜찮아?"
"..."

현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지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첫 면접에서 떨어졌어..."
"..."
"나... 이제 어떡하지?"

현우는 조용히 자판기로 가서 따뜻한 캔 커피를 가져왔다.

"울지 마. 다음에 더 잘하면 되잖아."
"근데..."
"너 알아? 난 네가 처음으로 전국연합 모의고사 1등 했을 때부터 알았어."
"뭘?"
"넌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민지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때 네가 3등이었잖아."
"그래서 더 잘 알지."
"뭘?"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더 이상 라이벌도, 그저 오랜 친구도 아닌...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현우의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 일찍 도서관 앞에서 만나자. 네가 좋아하는 호두과자 사올게."

민지는 문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취업 준비의 힘든 시간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서로의 존재가 이토록 소중해진 것은.

제 8장: 사회초년생의 시작

2023년 봄, 서울 강남구.

민지는 삼성전자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처음으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봄바람이 부는 강남역 8번 출구, 그곳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 여기서 뭐 해?"
"나 이 근처로 발령받았어."

현우였다. 네이버에 입사한 그는 강남 오피스에 배치받았다고 했다.

"어쩐지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자주 보이더라."
"너도 알고 있었어?"
"응... 매일 아침 저 계단에서 보이는 하얀 셔츠가 너였구나."

서로 모른 척했지만, 사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강남역에서 마주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좋아."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야, 민지야. 저 사람 누구야?"
회사 동기가 물었다.
"아... 그냥 오래된 친구?"
"친구 맞아? 얼굴이 빨개졌는데?"

네이버 사옥 근처 카페.

"강 대리, 옆 건물 삼성 그 여자분이랑 친해요?"
"어? 아... 그냥 오래 알던 사이예요."
"진짜요? 매일 점심시간마다 보이던데..."

두 사람의 관계는 회사에서도 소문이 났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아직도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우산 안 가져왔어?"
"응... 아침에 날씨 안 봤어."

현우는 망설임 없이 우산을 펼쳤다.
"같이 가자."

좁은 우산 속,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미안... 좀 좁네."
"아니야... 괜찮아."

그날 이후, 비가 올 때마다 두 사람은 우산을 함께 썼다.

첫 월급날.

"민지야,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응, 왜?"
"처음 받은 월급으로... 저녁 살게."
"진짜? 어디서?"

현우는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민지를 데려갔다. 강남 고층 빌딩 꼭대기,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와... 여기 예약하기 힘들다던데."
"그래? 난 첫 시도에 됐는데."

민지는 현우가 한 달 전부터 예약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서로 카카오톡을 보냈다.
'조심히 마셔.'
'너도.'
'끝나면 문자해.'
'응, 걱정 마.'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강남역 8번 출구에서 만나면.
"많이 안 마셨지?"
"응, 너도?"
"난 괜찮아."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자연스러워졌다.

첫 번째 명절 연휴 전날.

"고향 가?"
"응, 내일 아침 일찍 기차야. 너는?"
"나도... 같은 기차일지도."

실제로 같은 기차였다. 옆자리는 아니었지만, 수시로 눈이 마주쳤다.

출근 6개월 차가 되던 날.

"민지야."
"응?"
"우리... 이제 서로 좋아하는 거 맞지?"

갑작스러운 고백에 민지는 말을 잃었다. 현우도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강남역 8번 출구, 매일 아침 마주치던 그곳에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동안... 알고 있었어?"
"응... 너는?"
"나도..."

첫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1월의 첫 눈은 항상 금방 녹아버리지만, 두 사람의 마음만은 녹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정말 시작해도 될까?"
"뭘?"
"우리 이야기..."

민지는 대답 대신 현우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우연이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됐다.
스무 살의 설렘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마침내 고백할 수 있었다.

제 9장: 그리고 다시, 봄

2024년 3월,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

"요즘도 일찍 일어나?"
"응, 아침 7시..."
"여전하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를 봐왔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아침잠이 많은 현우가 학창시절부터 억지로 일찍 일어나려 했던 것도, 완벽주의자 민지가 스트레스 받을 때면 달달한 것을 찾는 것도.

"우리 참 오래 봤다, 그치?"
"그러게... 이제는 네가 없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네."

봄바람은 여전히 살랑였고, 벚꽃은 다시 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스무 살의 설렘을 안고, 마침내 서로를 마주 보게 된 두 사람.

"너 기억나? 유치원 때 내 크레파스 부러뜨렸던 거."
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아니야, 네가 먼저였어."
"에이,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 거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근데 말이야..."
"응?"
"그때부터 난 널 좋아했던 것 같아."

민지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
"진짜야. 네가 없는 날이면 유치원도 재미없었거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때는..."
"응?"
"네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이야기할 때마다 신경 쓰였어."
"알고 있었어."
"뭘?"
"너 표정 관리 진짜 못하거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매일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나도..."

창밖으로 벚꽃 잎이 흩날렸다.

"이제 보니까, 우리 참 바보같았다. 그치?"
"그러게... 이렇게 뻔한 걸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민지는 자신의 커피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닐까?"
"무슨 말이야?"
"네 단점도, 내 단점도 너무 잘 알잖아. 그래서 오히려... 더 망설였던 것 같아."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완벽주의자라는 것도, 스트레스 받으면 잠도 못 자는 것도..."
"너도 마찬가지야. 일에 빠지면 주변을 못 보는 것도, 고집 셈은 그대로라는 것도..."

"근데 말이야."
"응?"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널 좋아하게 됐어."

봄바람이 불어왔다. 20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민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가보는 거지, 뭐. 2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또 티격태격하면서?"
"그래도 이제는... 싸우고 나서 화해의 키스라도 할 수 있잖아."

민지는 얼굴을 붉혔다.
"야!"
"왜, 싫어?"
"...좋아."

카페 창밖으로 벚꽃이 흩날렸다. 마치 축복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민지야."
"응?"
"다음 봄에는... 우리 결혼할까?"

민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근데 이번에도 내가 먼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뭔 소리야?"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내가 늘 한 발 앞서 있었잖아."

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엔 내가 먼저야. 널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진작 먼저였으니까."

봄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왔다.
스무 살의 설렘을 안고, 서른 살이 되어서야 마침내 서로를 마주 보게 된 두 사람.
이제 그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지막 장: 스무 살의 봄

"현우 씨, 이제 알 것 같아요."

카페에 마주 앉은 민지가 말했다.

"뭘요?"

"우리가 왜 계속 마주치는지요. 어쩌면... 이게 운명일지도 모르겠네요."

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알 것 같아요. 왜 제가 20년 동안 민지 씨를 잊지 못했는지."

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렸다. 마치 스무 살 때처럼, 아니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에필로그

1년 후, 두 사람은 많은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 중에는 유치원 선생님도 계셨다.

"전 알고 있었어요. 이 둘이 서로를 이렇게 신경 쓰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선생님의 말씀에 하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민지와 현우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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